예린이의 하루 일기 같은 동화
피부과 의사가 되기까지, 사람의 시간을 품다
예린이는 요즘 아침에 병원 문을 열 때마다 잠시 멈춰 선다.
자동문이 열리기 전의 짧은 순간,
마치 하루의 마음을 정돈하는 의식처럼 숨을 고른다.
이 습관은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교실 문 앞에서 발표를 기다리던 순간과 닮아 있었다.
그때도 예린이는 늘 잠깐 멈췄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자기 마음을 먼저 붙잡기 위해.
오늘은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예약 진료가 가득 찼고,
중간중간 예상하지 못한 응급 환자도 들어왔다.
예린이는 시계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시간보다 사람을 먼저 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들어온 환자는 고등학생 여자아이였다.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예린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아이에게 말했다.
“천천히 괜찮아질 수 있어.”
그 말은 치료 계획보다 먼저 건넨 말이었다.
아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예린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은 아플 때,
자기 상태보다 먼저
희망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워왔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난 뒤,
아이는 나가기 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 학교 다시 가볼게요.”
예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말은 약보다 강한 회복의 신호였다.
잠시 진료실이 비었을 때
예린이는 창가에 서서 손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받아쓰기 연습을 하던 손,
일기장을 꼭 쥐고 글을 쓰던 손,
수많은 밤을 넘기며 책장을 넘기던 손.
그 손이 지금은
누군가의 상처를 만지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예린이는
여전히 일기장을 펼친다.
이제는 종이 대신 태블릿에 쓰지만,
형식은 달라져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은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아이가
조금은 앞을 보게 된 날이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예린이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그날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예린이는 초등학생 시절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상상을 한다.
아직 꿈이라는 단어조차 막연했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잘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흔들려도 멈추지 않으면 된다고.
예린이는 자신이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포기하지 않는 태도와
사람을 향한 관심을
하루도 놓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이 빠르게 방향을 정할 때
예린이는 늘 조금 느렸다.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느림은 때로 불안이 되었지만,
결국 깊이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밤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울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예린이는 일기장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오늘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 문장은 주문처럼
다음 날을 버티게 했다.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하던 날,
예린이는 다시 한번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피부과라는 글자를 적었다.
사람의 가장 바깥을 살피는 일이
결국 가장 깊은 곳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예린이는
여전히 모든 답을 알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질문을 피하지는 않는다.
아프지 않게 하는 법보다
아픔을 혼자 견디지 않게 하는 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린이의 하루는
오늘도 이어지고,
내일도 또 다른 일기로 남을 것이다.
이 동화가 전하는 마지막 교훈은
어쩌면 가장 단순하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의 선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아주 평범한 하루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결국 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린이는 오늘도
조용히 불을 끄고
다음 날을 준비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그 마음을
여전히 가슴에 안은 채로.
